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문단 편집) === 권력 강화와 대륙 통치 === 1644년(순치 원년) 11월 8일, 순치제는 자금성 태화전에서 다시 한번 즉위식을 가졌다. 여기서 순치제는 도르곤의 그간의 공적이 고대 중국의 [[문공(주)|주공 단]]과 같다며 크게 치하하였으며 도르곤의 칭호를 섭정왕에서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으로 올렸다. 또다른 섭정왕이었던 지르갈랑은 보정숙왕(補政叔王)으로 제수하였는데, 이는 종전의 섭정왕보다 더 낮은 작위였다. 이듬해인 1645년(순치 2년)에 도르곤은 자신에게 올리는 모든 장계에 황숙부섭정왕(皇叔父攝政王)이라 일컫게 하는 등 스스로의 권한을 강화하는 동시에 옥좌에 한단계 더 다가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말년인 1649년(순치 6년)에는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 자칭, 줄여서 황부왕이라 하였다. 도르곤이 숙부와 황부 등의 호칭에 크게 신경을 쓴 이유는 여러 황족들과 같이 친왕이나 군왕 등의 작위로 불리는 것보다 황제의 숙부, 황제의 부친으로 공인받아 불리는 것이 더 격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1647년(순치 4년)에 도르곤은 지르갈랑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그의 작위인 정친왕을 정군왕(鄭郡王)으로 격하시켰으며, 공석이 된 보정숙왕에는 자신의 아우 도도를 황숙보정왕(皇叔輔政王)에 앉히는 등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또한 어릴 때 순장된 자신의 어머니 대복진 울라나라씨를 [[효열무황후]]로 추숭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높였다.[* 물론 도르곤이 죽고나서 울라나라씨의 황후 추숭은 무효가 되었다.] 북경에 들어온지 이틀 후, 도르곤은 칙령을 내려 관리들에게 앞머리를 깎고 변발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조정 출사를 허용했다. 그러나 도르곤은 3주 만에 이 정책을 취소하였는데 북경 주변 도처에서 단발을 거부하는 백성들의 민란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편 도르곤은 북경 이북의 땅을 팔기군에게 하사하여 북경의 방위를 책임지도록 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북경 이북의 전답 또한 종전의 한족에게서 몰수하여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리하여 한족들은 새로이 지주가 된 만주족들에게 일정량의 곡물을 바치며 소작농으로 살아가야 했다. 비록 청나라가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차지하였으나, 남쪽에는 여전히 명나라에 충성하는 신하들과 종친들이 건재하였다. [[숭정제]]가 자살한 직후, 숭정제의 사촌인 복왕 [[홍광제|주유숭]][* 만력제의 3남이던 복왕 [[주상순]]의 아들로 아버지가 [[이자성의 난]] 때 [[식인|잡아먹히는 동안]] 도망쳐 복왕위를 이었고 숭정제 사후 [[남명|황제를 자칭했다.]]]이 남경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홍광(弘光)으로 정하였다. 도르곤은 친동생인 도도를 총사령관으로 내려보내어 남경을 함락시켰고 도도는 청군에게 항거했던 백성들을 살육하는 [[양주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도르곤은 한족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고 1645년(순치 2년) 7월 21일, 모든 한인에게 [[변발]]을 틀 것을 명하고 이를 거부하면 극형에 처할 것이라는 칙령을 내렸다. 한인들은 효경의 구절인 “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 신체발부, 수지부모, 부감훼상, 효지시야”(몸과 머리, 피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 이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모든 효의 시작이다.)를 들어 변발을 극렬히 반대하였다. 단발령은 한인들의 적개심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고, 도르곤과 북경의 조정은 명나라에서 항복해 온 장수들을 앞장세워 항거하는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참살하였다. 일부 한인 지식층은 산 속 깊숙이 은거하며 청나라의 중원 통치를 끝까지 부정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